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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주민의 삶을 돌아보다 (5) - ‘주민들과 함께한 인생 2막’ (우경림님의 삶)
골목을 지나다 오래된 양복점을 보고는 언젠가 그곳의 이야기를 꼭 기록해 두리라 벼르고 있었다. 일상이 바빠, ‘다음에 가야지, 다음에 가 봐야지’ 하다가 얼마 전 드디어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갔다. 그런데 양복점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못내 아쉬웠다. 빈 공간은 기다렸다는 듯 프랜차이즈 가게로 메워졌고, 오랜 시간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진 후였다.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이라 그런가,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허탈한 마음에 잠시 숨을 고르려 주변 공원에 들어섰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걸음을 옮기던 중 작은 숲을 지나 아담한 공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말해 주는 듯 작품들로 빼곡히 차있는 ‘숲속에 공방’, 그곳을 운영하는 우경림(60대) 씨를 만났다. ▲ 공방운영자 우경림 씨1. 공방의 시작 경림씨가 공방 운영을 시작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중년으로 접어든 50세 초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은 급속도로 나빠졌고, 그 때문에 수술까지 해야 했다. 문득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그동안은 자녀들 키우고 가정을 꾸리느라 통 정신이 없었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생각조차 해볼 수 없던 때였다.▲ 우경림 씨의 작품들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배우고 싶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면서부터 그림을 향한 욕구는 이미 그녀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동안 마음속에 묻어두고 지냈던 욕구가 솟구쳐 나왔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새로운 기법들을 찾아 배웠다. 하나 둘씩 배우다 보니 그 결과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한 창고 같은 곳이 하나 필요해졌다. 그리고 이웃들과 결과물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덩달아 생겨났다. 공방의 이름은 경림씨의 끝 자인 ‘수풀 림(林)’을 따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창동에서 살기 이전 그녀는 어린 시절을 성북구 정릉에서 보냈다. 성북구에 도봉구가 포함되어 있던 시절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늘 생각나는 것은 맑은 시냇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할머니와 함께 마당바위에 올라 빨래를 하던 추억이었다. 빨래하러 가는 날은 냇가 옆에서 새참도 먹으며 이웃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하루 종일 소풍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냇가 옆 너른 마당에 말린 빨래들은 다시 풀을 매겨서 그 자리에서 펴고 완성을 한 뒤에 집으로 가져왔다. 지금이라면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그때는 집안의 일례 행사처럼 치러졌다. 자연과 늘 함께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이제 그녀 작품의 소재가 됐고, 가게 이름에도 반영 됐다. 새참을 먹으며 이웃들과 두런두런 얘기 나누던 정겨운 시간들은 그녀 공방에서도 이어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언제든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갈 수 있는 사랑방 공간으로 그녀의 공방이 마을에 자리하게 됐다. 2013년도의 일이었다. ▲ '숲속에 공방' 내부2. 지역으로 나아가다 동네 사람들과 자연스레 교류를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예 활동들이 필요해졌다. 그럴 때마다 시간을 내어 새 작업 기술들을 익혀나갔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영리목적으로 운영하기에는 여전히 수익이 안 되는 사업이었다. ‘잘 될 때는 적은 용돈이라도 벌면 되고 안 될 때는 월세 정도 나오면 된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때문에, 창2동에서도 가장 월세가 저렴한 곳을 택했다. 다행히 8년 동안 한 번도 집값을 올리지 않은 주인아주머니를 만나 오랫동안 꾸준히 가게를 열 수 있었던 운도 따랐다.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들은 물론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이 점차 오고 가면서 친분도 많이 쌓게 됐다. 도봉구에 살면서 느끼는 어려운 점들이나 자식 이야기, 가족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덧 3명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모임이 생겨났다. 수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눠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해 먹으며 서로의 정을 돈독하게 키워갔다. 그러다가 차츰 지역을 위한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동네 주변에 있는 치킨집에서 버려지는 폐식용유를 이용하여 천연비누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처음에는 재료 공급처나 식용유를 잘 보관하는 일, 비율을 잘 맞춰 향긋한 비누로 재탄생시키기 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는데 힘을 합하니 조금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활동이 커지고, 만드는 양이 많아지자 사람들의 도움도 점점 더 필요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금적인 어려움까지 생겼다. 때마침 2014년도에는 마을 공동체라고 하는 도봉구에 있는 마을 학교 시스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공모사업을 통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모여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자금의 어려움도 해소할 수 있었다. 경림씨가 운영하던 공방이 창2동의 마을 문화센터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됐다. 마을활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가 됐다. ▲ 참동에 자리한 '숲속에 공방' 경림씨는 주민자치회 축제분과에서 활동하면서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봄이 되면 ‘에코 벚꽃축제’를 시작으로 여름에는 ‘초안산 매실축제’, 겨울에는 ‘행복 나눔 장터’와 ‘거리음악회’를 주민들과 함께 운영했다. 여러 행사에 쫓아다니며 참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서로 돌봐야 할 가족들도 있었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다보니 갈등이 늘 존재했다. 하지만 좋은 동네,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이전에 만들었던 천연비누에 이어 천연세제와 천연샴푸까지도 만들 수 있게 됐다. 2014년부터는 화장품, 방향제까지 그 종류를 늘려 환경을 생각한 제품들을 주민 스스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밖에 도봉 마을학교 사업에도 참여했다. 공방 공간이 빌 때면 마을 학교가 세 개 정도 들어와서 활동하였고, 도봉 평생학습관에 있는 여러 팀들이 들어와 공간을 함께 활용하고 있다. ▲ 우경림 씨3.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며 공방 운영과 주민자치회 운영, 다양한 지역 네트워크 플랫폼에 참여하다 보면 식사 때를 놓치는 일은 허다하고, 날짜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생활하는 게 일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계속 한다. 누구보다 열정과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그림에 꾸준히 노력을 더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러스트를 배워 그리며 마음의 위안도 얻고, 지인들에게 작품을 선물하기도 한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작품이 조금씩 팔리기도 한다. 경림씨가 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분야는 사회복지학이다. 그녀는 이전에 창2동 주민 센터를 통해 선발된 ‘나눔 이웃’ 대상자와 함께 천연 제품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주로 저소득층 이웃이나 몸이 불편한 분들,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면서 그녀는 더욱 보람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편히 쉴만한 나이임에도 아직도 학생을 자처하는 이유였다. 최근 경림씨는 자신의 집이 있는 창3동에서도 마을 일을 시작하게 됐다. 도시재생 공모 사업에 참여하면서, 주민들과의 소통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지역의 현황과 역사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주민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속해있는 공방분과에서는 사업 아이템이나 개발을 위해 지역 주민들이 함께 모여서 연구하고 있다. 이제까지 만들어 온 환경 제품들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생산하고 이를 판매해서 공공수익으로 환원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환경도 살리고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경림씨의 예술을 향한 열정이나 이웃과 지역에 헌신하는 마음은 끝이 없다. 아직도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활동하는 그녀를 보면, 청춘이란 단어는 나이와는 전혀 무관한 듯싶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지역의 일, 어려운 이웃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숲속에 공방’. 그녀와 더불어 그녀의 꿈이 시작했던 그 공간은 아마 오랫동안 도봉구를 지킬 것 같다. 한두 해가 지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뜨내기 공간이 아닌, 지친 지역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고 지역의 시간이 응축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숲속의 공방’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길 바란다.<정지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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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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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걷는 사람들
마을을 걸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마을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알리는 사람들. 마을 걷기 간사라는 분들이 계신다. 걷고자 하는 곳을 미리 걸어보며 답사하고 권유하며 때로는 책으로 내기도 한다. 오늘은 마을 걷기 간사 김대선 선생님과 도봉의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Q 도봉 마을 걷기 간사는 어떠한 직업인가요? A 도봉구 내의 걷고자 하는 곳을 미리 답사하거나 걸어온 길을 정리하는 일이구요. 같이 걷자고 권유하는 일이 주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끔 저희의 활동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적도 있습니다. 특히 도봉구는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유명하지요. 저는 이런 장점이 도봉구의 지역발전전략으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Q 코로나 도봉 마을 걷기 간사의 일은 무엇이 바뀌었나요? A 코로나19 이후 마을걷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어요. 그래서 간사의 일도 거의 개점휴업상태라고나 할까요. 함께 걷는다는 것에는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간식을 나누고 식사하는 것, 서로의 것을 나누는 활동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이 결코 권장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자연스레 마을걷기의 활동을 멈추게 되었구요.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걸으면서 나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온라인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역동성을 제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는 나눔의 플랫폼을 개발한다거나 하는 활동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Q 그럼에도 마을 걷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있는 곳을 알기 위함입니다. 가만히 그 자리에만 멈추어 있으면 우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혜민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쓰셨는데 걸어야 비로소 보인다는 저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혜민스님’은 바쁜 일상을 기준으로 삼으셨고 저는 멈추어 선 상태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겠지요.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걷다보면 누구나 자기가 가야할 바를 자연스레 찾게 됩니다. 걸으면서 체험하는 다양한 변화를 통해 어디로 가야 좋은 경험을 얻을지 스스로 깨닫게 되고 이것은 곧 방향성을 제시하게 됩니다. 정처없이 걷다가 찾게 되는 인생의 철학적 가치가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Q 소소하게 도봉구에서 이루고 싶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A 걷기를 하는 사람이니 구민들 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같이 걷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되고 나누게 됩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에 쉬이 지치지 않습니다. 좋은 주제와 소재, 줄거리가 엮이고 이야기가 끊기지 않습니다. 함께 걷는 이가 생기고 그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저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의 길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Q 10년 후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지 묘사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그때쯤이면 어떻게 걷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것 같아요. 이미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도봉구에 사셨던 바람과 풀의 시인 ‘김수영’의 글을 인용해볼까 합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 김수영 - 온몸으로 걷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김대선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가끔은 머무르지 않고 마을을 걸어다니며 도봉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자신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민들에게 걷기의 행복을 전달해주는 우리 도봉구의 마을 걷기 간사. 비록 직접 만나서 소통하고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현재에는 지역의 걷기가 힘들어졌지만 간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플랫폼에서 새로운 마을 걷기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정세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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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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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도봉토박이 소녀 김연서
17살의 소녀를 만나러 가는 일은 그 자체로 설레었다. 10년 전 아직 초등학교도 가기 전에 본 이후 처음이다. 잊고 있었는데 연서에 대한 기억이 소환된 것은 모 신문 기자인 연서 아버지가 페이스북에 실은 글 때문이었다. 딸인 연서가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고 있고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연서가 궁금했다. 연서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였고 다행히 연서의 허락을 득하였다. 인터뷰는 연서의 집에서 하였다. ▲ 17살 도봉토박이 김연서 학생 첫 질문은 연서라는 이름의 뜻이었다. 혹시 연애편지라는 뜻은 아니냐고 물어 보았다. 편하게 말문을 트고 싶어 농담처럼 건네 본 것이다. “연애편지 이런 뜻은 아니고요, 깊은 지혜라는 뜻이에요. 연못이라는 뜻도 있지만 깊다는 뜻도 있는 연(淵), 지혜 서(㥠)입니다. 연은 항렬에서 돌림자이기도 해요.” 어릴 때 연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른들 모임에 부모랑 같이 온 어린 연서가 칭얼대거나 보채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속 깊은 아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어릴 때 모습이 깊은 지혜라는 뜻과 잘 어울렸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너무 기뻐하시는 것 같아 집에 빨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터뷰는 이렇게 속 깊은 연서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연서는 2005년생이다 21세기에 태어난 그야말로 디지털 세대인데 아날로그 감성인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기하고 놀라웠다. 왜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지 물어 보았다. “디지털 사진이 주는 고감도의 화질보다 필름 사진의 빛바랜 듯한 감성이 마음에 들어요. 중학교 때에는 아버지의 수동식 필름 카메라로 찍었는데 들고 다니기가 무거워 요즘은 1회용 필름 카메라로 주로 찍어요. 제가 찍은 사진에 대해 친구들이 마음에 든다는 반응을 해 주어 더 열심히 찍게 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제가 보는 것들을 남기고 싶어서예요. 인화한 사진을 보면 기억을 확인하는 느낌이라 계속 사진을 찍게 돼요.”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인화를 해야 하는데 동네 근처에 인화하는 곳이 있냐고 물었다. “충무로까지 나가야 해요. 그곳에 가서 인화도 하지만 1회용 카메라도 사고 필름도 삽니다.” 그때 연서 아버지가 말을 거들었다. 연서와 함께 인화를 하러 충무로에 가 보았는데 사진관 앞에 길게 줄이 늘어져 있어서 놀랐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라서 한 번 더 놀랐다고 했다. ▲ 연서가 찍은 사진. 한 폭의 수묵화 같다. 필름 사고 끼우고 인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귀찮지 않은지 물어 보았다. “귀찮아서 오히려 좋아요.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인화하는 그런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어요.” 편리한 것만 좇는다고 생각한 젊은 세대에 대한 나의 편견이 깨어졌다. 사진을 찍으러 즐겨 가는 장소가 어디인가 궁금했다. “특별히 정해 놓고 찍는다기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자유롭게 찍어요. 음악을 들으며 발바닥 공원으로 산책을 가곤 하는데 그 주변도 찍고 친구들과 카페에 가면 카페랑 친구 모습도 찍고 그러죠.”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는 말에 쌍리단길의 카페도 자주 가서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쌍리단길은 주머니가 가벼운 고등학생인 제가 가기에는 좀 부담스러워요. 쌍리단길 카페 같은 경우는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기에 좋은 장소이긴 하지만요.” ▲ 사진을 찍느라 무아지경인 연서 연서는 쌍문동에 있는 ‘세그루패션디자인고등학교’ 학생이다. 인문계가 아닌 특성화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은 뭔가 그 나름대로 뜻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성화학교로 간 것은 대학 진학보다 취업을 먼저 하고 싶어서인지 물어보았다. “아니에요. 대학을 먼저 가려고 해요. 대학 입시만을 위한 공부보다는 제가 원하는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서 특성화고로 왔어요. 제가 다니는 학과는 VMD과입니다. 상품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판매장을 매력적으로 꾸미고 관리하는 일을 배우죠. 인문계에서는 이런 공부를 할 수 없으니까 많이 고민하다가 특성화고를 선택했어요.” 고등학교 이후의 꿈도 이야기했다. “대학은 경영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과를 가고 싶어졌어요. 디자인 회사에 취업을 하고 경력을 쌓고 난 후 제 사업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특성화고를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반대했는데 제가 설득을 했어요.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연서 어머니께 연서가 특성화고를 간다고 했을 때 선뜻 찬성을 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찬성은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서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로를 고민한 흔적도 느껴졌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는 딸이 대견했다고 한다. 연서의 생각을 최대한 존중해 주기로 했고 잘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연서 어머니는 오랜 세월 시민운동가 활동을 하고 있다. 시민활동가라면 시민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딸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귀기울여주고 공감을 해주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서에게 혹시 특성화고에 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너무 좋아요. 배우는 과목이 제가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라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학교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인문계를 갔으면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어요. 목소리가 조용조용하고 손짓이나 행동이 많지 않아 내성적인 것 같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다. “친구들과 있으면 엄청 활발해요. 장난도 많이 치구요.” 친구는 많은 편인지 아니면 몇 친구와 깊이 있게 사귀는 편인지를 물어 보았다. “두루두루 많은 편이에요. 제가 친구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라 그런지 친구들이 저를 많이 찾아요. 이번 생일에 친구들에게서 축하 메시지가 많이 왔어요. 지금 우리 반 친구뿐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까지 보내주었어요. 제가 카톡에 생일 알림 설정을 지웠는데도 제 생일을 기억해 주는 친구가 이렇게 많다는 것에 저도 놀랐어요.” 어떤 말이 가장 마음에 드는 메시지였느냐고 물었더니 “연서 네가 있어 참 행복하다는 말에 저도 행복했어요.”라고 말했다. 요즘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밤 12시에 맞추어 보내준다고 한다. 생일이 시작하자마자 축하하겠다는 뜻으로 그렇게들 보낸다고 한다. 연서는 그런 친구들과 어른이 되어서도 우정이 변치 않고 계속 만나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라고 했다. 남자 친구는 없느냐는 질문도 하였다. “없어요. 중학교 이후 안 사귀고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기간 동안은 안 사귀려고 해요.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공부가 많아요.” 왠지 연서 아버지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서린 듯했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독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정보는 컴퓨터를 검색하거나 유튜브 등을 통해 얻는다고 했다. 친구들과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느냐고 물었다. 요즘 친구들 사이에 MBTI가 유행이라고 하였다. 한때 MBTI 강사 공부를 했던 것이 떠올라 연서의 유형을 물어 보았다. ESFP라고 하였다. ESFP는 MBTI 16가지 유형 중 가장 관대하고 온정적이며 낙천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연서 어머니께서 딸이지만 연서와 대화를 하면 위로가 될 때가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걱정을 하는데 연서는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말해요. 저는 ‘그러면 어떻게 해’라고 말하는 편인데 저와 많이 달라요. 힘들 때 연서와 말을 나누다보면 제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 연서네 가족사진. 왼쪽에서부터 엄마, 연서, 아빠. 인터뷰를 끝내며 연서에게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하였다. “참을성, 책임감을 꼽고 싶어요.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배려를 잘 하고 리더십도 있다고 생각해요.” 연서라는 이름이 깊은 지혜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연애편지로 해석해도 좋을 듯했다. 연서가 주변 사람들에게 연애편지를 읽을 때처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의 17살 소녀를 만나고 가는 길은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가 아니라 들꽃 가득한 산책길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연서가 지금 이 모습으로 잘 자라 멋진 어른이 되기를 바라며 집으로 왔다. <이혜경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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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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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따뜻한 복지사를 만나다.
빨간 단풍이 피는 가을, 창동에 거주하고 있는 29살 박수창 씨를 찾아갔다. 도봉구에 자리를 잡은 지 어느덧 20년이 넘는 시간, 수창 씨는 사회복지사로서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가고 있다. 반갑습니다. 사회복지사 수창 씨는 기관에서 어떤 일을 맡으셨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수락산역 근처에 있는 북부종합사회복지관에 몸 담고 있습니다. 기관 병설 시설로 있는 장애인주간보호센터에서 장애인들이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돌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체육, 안전과 방역 관리를 관리합니다. 그럼 지금의 직업 말고도 다른 꿈이 있었나요? 원래는 레저 업종에서 즐겁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었습니다. 학부 시절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수영장, 스키장에서 일하다 보니 적성에 꽤 맞더라고요. 자연스레 스포츠와 관련된 직종을 꿈꿔왔던 것 같아요. 지금의 직업 또한 서로 협업하면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스포츠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이 있네요. 운동에 진심인 수창 씨! 다른 취미도 있으신가요? 운동을 하지 않을 때는 캠핑이나 여행을 떠나거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평일에 일하다 보니 주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해요. 물론 집에서 편히 쉬는 날도 필요하지만 대체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에요. 주말을 알차게 보내는 게 저한테는 잘 쉬는 거 같거든요. ▲ 잠실대로, 한강야경 사진▲ 캠핑, 여행 사진수창 님은 에너자이저 같은 분이군요.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많아지면 부상의 위험도 크잖아요. 수창 님도 운동하면서 위험한 순간이 있었나요? 다행히 운동하면서 큰 부상은 없었지만 발목, 어깨 등 자잘하게 아팠어요. (웃음) 그럴 때마다 충분한 휴식과 재활로 몸을 재정비했습니다. 다쳤다고 운동을 멈추진 않았어요. 조금씩 다친 부위를 움직여가며 평소 컨디션으로 무사히 회복했습니다.특별한 날, 챙겨 드시는 보양식이 있으신가요? 말복 등 특별한 날에는 삼계탕을 먹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닭고기는 단백질이 많고 맛있잖아요. 운동을 하다 보니 복날이 아니어도 닭과 관련된 식품을 자주 먹어요. 아마 매일매일 닭으로 보양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고등학생부터 운동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지칠 법도 한데 힘들진 않으신가요? 운동하면 건강해진다고, 재밌다고만 할 순 없어요.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겁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지나왔기에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이 정말 대단하거든요. 스스로 해냈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선물처럼 주어지니까요. 눈앞에서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운동을 안 찾을래야 안 찾을 수가 없네요. 이 정도면 운동 유전자가 따로 있을까 싶은데‥… 가족 중에 수창 씨가 영향을 받은 운동인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과 자주 산에 올랐어요. 등산을 즐겨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동과 친해졌나 봅니다. ▲ 가을 태백산 건강한 취미를 가진 수창 씨!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사회복지 일화들을 소개해 주세요. 근무지 특성상 이용자들의 문제행동이 무척 다양합니다.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계획한 방향이 도움이 될까, 프로그램 시작 전에 고민하고 또 다짐합니다. 다행히도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고 문제행동이 점차 완화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행복합니다. 그들이 즐거워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요. 매일 보람되고 그래서 계속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며(운동이 아니더라도요) 자신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셨으면 좋겠어요. 밝은 에너지와 강한 정신력을 가진 수창 씨는 코로나가 종식되면 긴 여행길에 오른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등에서 수창 씨를 다시 마주칠지도. 그곳이 어느 길이든 자신을 찾는 여행길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이태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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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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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행복한 사람 김나연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안녕하세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 2학년 김나연 입니다. 저는 도봉구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쭉 살아서 23년 거주했어요. 개강 이후 학교 수업을 들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 도봉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자연과 산책을 좋아해서 발바닥공원을 가장 좋아해요. 그리고 책을 좋아해서 도봉도서관도 좋아해요. 어렸을 때 도봉도서관 어린이실에서 어머니랑 책을 많이 읽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학마을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자주 했어요. 성인이 된 이후로는 시간이 안돼서 많이 못 갔지만요. - 도봉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소개 부탁드려요.2019년에 도봉구 청년네트워크 보건복지분과에서 활동했어요. 그때 도봉구 청년 정신건강 증진에 대한 정책을 도봉구청장에게 제안서를 제출했어요. 채택되진 않았지만, 정책 제안을 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어요.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도봉구청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방학 3동 주민센터 지하에 만화카페가 있는데 만화책 정리 정돈하는 일이었죠. 어렸을 적에는 도봉구에서 주최하는 그림대회나 도봉문화원에서 하는 그림대회를 자주 나갔어요. 어머니가 미술 학원을 하셔서 그림을 잘 그리거든요. 상도 많이 받았어요. 옛날에 도봉산에 있는 도봉서원에서 그림대회를 했었는데, 가족들이랑 다 같이 그림 그리고 등산도 하고 상도 받았어요. - 도봉구에 거주하시면서 경험한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정말 학생들을 잘 챙겨주시고 이해해 주시는 분이었어요. 그때는 격주마다 토요일에 학교를 나갔는데요.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 학교에서 런닝맨을 하고, 학교에서 다같이 하룻밤 자면서 놀았던 기억이 가장 기억이 남아요. 고등학생 때는 동네 친구들과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를 했던 추억이 있어요. 그때만큼 순수했던 시절이 없던 거 같아요. 세월이 흘러갈수록 동네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져요. 순수하게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 코로나 전에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어머니와 함께 간 스페인 여행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날씨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가장 좋았어요. 2026년 정도에 완공이 되는데 완공되면 또 가고 싶어요.반수를 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간 미국 여행도 기억에 남아요. 3주 동안 서부여행을 했어요. 자연경관을 좋아해서 그랜드캐니언과 사막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가족들이랑 다 같이 가서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 코로나 이후엔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저는 외향적인 사람이라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제한된 게 처음에는 적응 힘들었어요. 그러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늘어나서 평소 배우고 싶었던 드럼과 중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또 읽고 싶던 책을 읽으며 보내고 있어요. - 동아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풍물패 어울패’에서 장구를 치면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5월에 대동제 때 동아리원들과 다함께 큰 공연을 했어요. 매해 1월 1일에는 종각에서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판굿을 했어요. 공연 외에도 10일 정도 전북 필봉으로 가서 여름 전수를 받고 다양한 활동을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처음으로 수장구를 맡아 진행한 공연이었던 이월식 공연이에요. 우리 학번이 회장단을 넘겨받고 공연을 이끌어봤던 경험이 기억에 남아요.- 한의과대학에 재학 중이신데 한의사라는 꿈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제 자신도 발전할 수 있는 직업은 무엇일까 생각을 하다가 한의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어요.- 반수를 하게 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입학할 때부터 반수를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자퇴를 하고 재수를 하고 싶었는데 한 학기를 다녔어요. 종강하자마자 반수를 해야겠다고 부모님을 설득 해서 휴학하고 반수 학원을 등록했어요. 반수를 할 때 사실 행복했어요.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능 공부를 해서 즐거웠어요. 점수도 잘 나오고 목표를 이루어서 한의과대학에 입학해서 행복하고 학교생활이 너무 재밌어요. - 예과 2년, 본과 4년을 총 6년을 공부하시는데 지치지 않고 공부를 하는 비법이 있나요?사실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인 거 같아요.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왜 이 공부를 하고 어떤 응용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요. 교과서 안에 있는 지식보다 침을 놓거나 처방을 하는 등 실제로 해봤을 때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고 의미도 와 닿더라고요. 배운 것을 응용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 예과와 본과의 차이가 있나요?예과는 전공기초와 교양을 배워요. 그때는 지금보다 학습량이 적었어요. 본과 오면 전공 공부만 하니까 9 to 6 시간표가 꽉 차있어요. (거의 헤르미온느 시간표 수준이에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수업이 있어요. 예과 때는 전공에 대해 깊게 배우지 않아서 공부만 했는데, 본과에는 성적관리가 중요해요. 좋은 한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할 때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그만큼 스트레스와 부담이 많아요. 그래도 학문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본과에서 공부의 재미를 느꼈어요. - 의료봉사팀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면서 느낀 점이 있나요?장애인 독립 진료소 학생봉사팀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많이 활동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한의사 선생님들이 오셔서 참관하고 선생님이 차팅을 하시는 걸 봐요. 처방된 약을 포장하거나, 잡무를 담당했어요. 의료현장을 옆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임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무엇인가요?해부학 수업 때 카데바 실습을 했어요. 실습을 하기 전에 시신을 기증해 주신 분들에게 고사를 지내고 감사함을 표현한 후 해부 실습을 하는데, 의료인으로서의 무게를 느꼈어요. 진지하게 의료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 생겼어요. 그전까지는 크게 와 닿진 않았는데 카데바 실습으로 인해 정말 큰 책임감을 느꼈어요. - 졸업 후에 어떤 한의사가 되고 싶나요? 환자를 이해하는 한의사가 되고 싶어요. 뛰어난 치료 실력은 당연히 뒷받침되는 그런 한의사가 되고 싶네요. 예전에 심장이 아파서 응급실을 간 적이 있어요. 침대에 누워서 검사를 받는 와중에도 큰 병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심장 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어요. 다행히 아무 이상은 없었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환자들의 불안을 줄여주는 의사가 돼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신체적, 정신적 아픔을 들어주고 공감, 치료할 수 있는 한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 혹시 앞으로의 꿈과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다양한 경험을 하고 제 삶을 충실히 살면서 행복하게 즐기면서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행복한 그런 상태를 유지하려고 많이 노력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이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하나하나 시도를 해보고 경험하며 만들어 가며 인생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목표는 여성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의료복지재단 설립을 하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서 경력도 쌓이고 경제력도 준비가 되면 의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싶어요. 오늘은 10년 지기 친구인 나연님을 인터뷰하였습니다. 항상 친구로서 참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나연님께서 도봉구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셔서 그런지 참여한 활동도 다양했습니다. 오랜 친구와 함께 추억들을 꺼내어보며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연님의 행복한 인생을 응원합니다!<이수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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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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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인, 국악을 사랑하는 그녀, 더 높은 꿈을 향해 오늘도 달리는 중...-손혜리
"꿈을 향해 달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피터팬(1957)>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처럼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청년 예술가란 타이틀로 꿈을 현실로 만든 멋진 그녀. 더 멋지고 큰 능력을 갖추기 위해 24시간을 학업과 경제활동, 예술 활동을 소화하며 힘차게 달리고 있는 손혜리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Q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서울태생의 국악 청년예술인 손혜리입니다. 저는 별명이 “인간 비타민” 또는 “분위기 메이커”로 통해요. 어딜 가나 밝고 쾌활해서 ‘명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주변 분들이 늘 말씀해 주세요. 분위기를 때론 따듯하고 훈훈하게, 때론 재미나게 이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연령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와 친목을 유지하는 인간 쿼카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없다고 생각하며 모두와 짝지가 되고 싶어요! 청년 국악인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고, 전공은 전통공연예술학과를 졸업했어요. 서울을 무대로 우리의 뿌리인 전통으로 소통하고 있고, 더 소통하고 싶어요! 지금은 문화기획, 공연기획, 축제 기획을 공부하고 마을과 지역, 우리 문화와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 사실 여러 가지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너무 공부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배우고 싶어요. Q 도봉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신기한 인연이에요. 활동지역이 도봉구까지 이어질 줄 몰랐는데, 여기저기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도봉구까지 활동지역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제게는 꿈같은 곳이에요. 자연이 너무 멋져요. 예술 작품 같은 장소도 너무 많고요! 살아있는 전통 작품 같아요. 다른 구의 예술인, 청년들과도 분위기가 또 달라요. 분위기가 훨씬 진취적이고 미래 지향적이에요. 개인적으로 배울 점이 많아요. 꼭 도봉구 예술인들과 작업하고 싶어요. Q 국악인으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그 계기가 궁금하네요? 중학교의 CA시간이 시작이었는데, 벌써 13년 전이네요? 아토피가 심해서 학창시절 12년 동안 심한 왕따를 당했어요. (아니 아토피 때문에 왕따라니 좀 심했네요. 아무리 어리고 철없다고 해도 그렇지.) 여기저기 CA 부서 면접에 떨어지고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놀림을 당한 후에 우두커니 교실을 채우고 있었는데, 한 선배 언니가 저에게 사물놀이부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어요. 정말 내키지 않았던 부였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담임선생님의 독촉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했던 사물놀이부가 국악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웃기죠? 그때는 진짜 창피했어요. 아니 이렇게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것을 왜 학교까지 와서 해야 하나? 애들이 더 놀릴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전국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선배들과 후배들과 밤까지 연습했던 그 기억이 제게는 너무 센세이션 했어요. 저는 항상 실패자였거든요. 그 전국대회에서 금상을 탔을 때 생각했어요. 나를 이끌어주다니? 나를 쓸모 있게 만들어주다니! "아, 나 좀 빛나는 것 같아." Q 도봉 문화기획자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해 주세요. 정말 감사한 타이틀이에요 영광입니다. 제가 하는 전통음악을 조금 더 모두에게 쉽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기획 공부를 시작하였어요. 작년 11월부터 준비해오던 마을 아카이브 작업 사업에 합격한 것이 기획자로서의 저의 첫 도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당시 경쟁률이 꽤 높았는데, 벌벌 떨면서 인터뷰 심사를 했던 기억나네요. 그 손 떨림이 아직도 생생해요. 준비한 예상 대답 메모가 담긴 종이를 벌벌 흔들며 대답했죠. 그리고 올해, 좀 더 배우고 싶어서 도봉문화기획학교를 수료하고 있어요. 여러분, 도봉문화기획학교 너무 추천합니다!! 또 전통문화기획자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있어요. 공연과 전시도 많이 보러 다니고요. 하고 싶은 것, 그리는 것이 너무 많았는데 뜬구름이더라고요. 잘 알지도 못하고요. 요즘에는 시간이 없기도 해서 짬짬이 이동할 때마다 독서를 진짜 많이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제가 생각하고 그리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가지치기하고 좀 더 보완하는 데에는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더라고요. 기획은 저의 예술적 고민을 풀 수 있는 매개가 될 것 같아요. 올해는 '손 내밀어주는 언니'라고 저와 같은 사회초년생 초보 예술인과 비전공 예술인을 위해 선배 예술인들의 사회초년생 때를 인터뷰하고, 간단한 팁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는 개인 기획을 진행하고 있어요. 작은 규모의 기획이지만 저의 정체성이 담겨있답니다. 이 글을 읽는다면 인스타그램에 '손 내밀어주는 언니'를 검색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하하 홍보 타임이에요!) 그리고 마침 오늘 합격 결과를 받은 것이 있는데요. ‘도봉 로컬메이커’라는 타이틀 아래 다른 기획자분들과 협업하여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멋진 도봉을 만드는데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라 매우 기뻐요. 열심히 도봉을 알리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Q 청년예술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신념'이에요. 최근 한 선생님이 제게 문화예술인으로서 필요한 게 무엇일 것 같냐고 물었는데, 그때 저는 법이라고 얘기를 하며 이유를 대다가 알아차렸어요. 아, 이것을 ' 신념'이라고 하는구나. 예술은 한정 지을 수 없어서 자신만의 법인,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혼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저' 가락을 저렇게 똑같이 해낼 수 있을까에 목을 매었던 것 같아요. 다른 형태의 가락을 하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라고 저도 모르게 규정지었어요. 저는 아직도 국악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요. 하지만 모두 다 같은 고민으로 사는 것 같더라고요. (하하) 항상 저는 누군가를 따라가고 누군가를 답습하는 사람으로만 존재했었어요. 지금은 저로서 충분한, 자력 할 힘이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활동하려고 해요. Q 예술 활동하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어떤 말이었나요? "열정 페이"요. 최근 지역 문화 활동하시는 선생님께서 전통 관련 기획을 하시는데 제게 잠시 장구 좀 쳐줄 수 있냐며 손을 휘적휘적하는 모습을 보이셨는데요. 총체적 난국, 제가 가장 싫어하는 동작과 제의였어요. 당연히 무보수로요. 저는 (다른 악기도 있겠지만) 장구를 쳐서 활동하고, 돈 버는 사람인데, 그것을 가벼이 여기는 모습이 너무 싫어요. 정말 실망스럽죠. 저는 그 잠깐 장구를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하러 그 큰 장구를 챙기고, 옷도 챙기고. 또 국악인으로서 기대에 부응해야 하잖아요? 전통을 공부하며 활동하는 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실례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을 흔드는 것을 무례라고 하면서 유독 전통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술단 활동할 때에는 '모란봉 예술단'이냐는 장난 섞인 질문을 들은 적 있어요. 전통이라는 것을 조금 더 존중하고 문화라고 생각하였으면 절대 우습게 표현하지 않을 텐데…. 정말 ‘일본강점기의 한국문화 말살이 정말 치명적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제가 전공을 한 이유도 전통과 국악을 가볍고 우습게 여기는 모습을 내가 바꿀 순 없지만 작은 날갯짓을 해보자는 마음도 조금 있어요. 너무 원대하죠. 저에게는 세계 통일과 같은 큰 의제예요. 이 사람들아 나는 고리타분한 전통으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 전통, 정말 재밌는 예술이에요. 관심 두고 한번 들여다봐 주세요. Q 무대 공포증은 없을 것 같은데 어때요? 저도 무대 공포증 있어요. 무대에 서기 전 5번 속으로 외쳐요. 자기 암시라고 하죠?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겨 낼 수 있어. 난 무대 위에서 너희는 무대 밑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요. 무대에 있을 때 제일 멋지고 살아있는 나인 것 같고. 그래서 무대에 서고 싶은 것 같아요. 무대라는 게 참 재미있어요. 무대에 올랐을 때 느낌은 목각인형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신체에 있는 수십 개의 관절 중에 10개만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 앉아서 삐걱삐걱 서서 율동하고. 그런데도 무대에 섰을 때가 제일 짜릿하죠. 그 짜릿함이 긴장인 것 같아요. Q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지금 판소리랑 강강술래를 배워보고 싶어요. 제 목소리가 참 좋은데, 판소리를 접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조자룡이 활 쏘는 대목, 수궁가 토끼 잡는 대목 등등 현대 표준말로 변경해서 모두에게 쉽게 판소리를 해보고 싶어요. 꼭 해보고 싶은 작업입니다. 그리고 설장구, 진도 북춤, 살풀이도 배우고 싶어요! 말하고 보니 다 전통이네요. 점점 더 깊이 이쪽 분야를 배우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좀 더 나답게 스스로 당당해지고 싶어요. 좀 더 예술인으로서, 내가 나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하고 싶은 일이 대성 하면 좋겠습니다. 정말 ‘진인사대천명’입니다. Q 2021년은 본인에게 어떤 해였나요? 제게 2021년은 '기적‘이에요. 정말 다사다난했어요. 27살에서 앞자리를 떼면 7살인데, 이제 사회라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기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올해 3월에 문화기획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학교도 다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아 진짜 사람은 배워야 하는구나."라고 뼈저리게 느꼈어요. 저는 혼자서 갉아먹는 사람이었거든요. 진짜 어리석었어요. 시도도 하지 않고 저의 미래를 점치고, 내가 뭐가 되겠어? 라고 생각했거든요. 건방지고 어리석었죠. 그리고 올해 2021년 6월에 2년 동안 연습했던 예술단에서 활동도 못 해보고 연습만 하다 기획하지 않는다고 쫓겨나오게 되었어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지만 어차피 지난 일 되돌아볼까? 하고 되돌아봤더니 저에게 기회가 아니었더라고요. 확실히 느꼈어요. 기회는 내가 만드는 거였구나! 가만히 기다리면 안 되는구나. 2021년은 제게 ‘하면 된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해였어요. 이제 2021년이 100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제게 2021년은 정말 '기적' 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20대에 활발하게 창작활동과 경제활동을 하는 국악 청년예술인 손혜리님을 만나보았습니다. 24시간을 빠듯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녀의 일정을 보고 새삼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모습. 고민 하나 없을 것 같은…. 밝은 얼굴로 끊임없이 전통음악에 깊이 있게 다가서려는 욕심과 열정이 인터뷰 내내 느껴졌습니다. 사람 관계에도 지혜롭고 분위기를 밝게 서로 응원해주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또 현재 준비 중인 전통을 대중화하기 위해 작업 중인 부분도 원하는 대로 잘 이루어져서 일반인이 더욱 전통음악을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멋진 결과가 나오길 응원합니다. 판소리를 비롯하여 더 깊이 있게 국악을 배우는 것을 희망하는 그녀. 지치지 않고 평생의 직업으로 모든 시간 속에서 국악이 그녀에게 큰 기쁨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녀가 앞으로 더욱 놀랍게 성장할 것이라 믿으며, 멋진 청년 예술가와의 기분 좋은 만남이었습니다.1) 쿼카(quokka): 작은 캥거루. 캥거루과 쿼카속의 소형 동물로, 오스트레일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남서부 퍼스 연안의 로트네스트섬에 주로 서식한다. 크기는 약 40~55cm, 무게는 약 2.5~5kg, 꼬리 길이는 25~30cm로 작은 캥거루 같은 외모에 둥글고 땅딸막한 귀를 가지고 있다. 웃는 것처럼 보이는 귀여운 얼굴로 유명하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물'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쿼카는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경계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쿼카 - 쿠아카왈라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2) CA : 특별활동, 동아리 활동, 방과 후 활동 등 의미<유명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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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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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같이 편안한 도봉구, 추억을 되새기며
지금으로부터 20년 전부터 도봉구에 살아온 청년이 있다. 도봉구 청년 토박이인 셈이다. 이 청년은 최근 학업으로 인해 도봉구를 3년간 떠나있었다. 전북에 거주하며 잠시 고향을 떠나있다가 2020년에 도봉구로 다시 돌아온 청년은 3년 사이 도봉구가 많이 달라져 있다고 말한다. 20대 청년이 바라본 도봉구의 변화는 어떠할까? 2010년, 우리가 모두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나 도봉구에서 함께 10대를 보낸 친구 왕희원과 달라진 도봉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3년 만에 찾은 도봉구가 많은 변화를 이루고 있어 놀라움과 기대감이 느껴진다는 왕희원의 소감이 여러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도봉구 동네 친구로서 창동역 주변 피시방과 노래방을 쏘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선명해졌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도봉구의 20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 2001년부터 도봉구에 살았다고 들었어요. 그 시절 도봉구는 어떤 동네였나요?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인 2001년에는 정말 허허벌판이었어요. 그때 도봉구청이랑 아파트들을 짓기 시작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창도초등학교를 나왔는데, 항상 방과 후에 중랑천에서 친구들과 개구리를 잡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중랑천이 한창 자전거 도로를 깔면서 공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공사 때문인지 고인 물이 많았어요. 그래서 고인 물에 개구리들이 알을 많이 낳아서 그 알들을 잡아 집에서 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도봉구는 정말 시골이었던 거 같습니다. 또 2002 월드컵을 밖에서 스크린을 보며 응원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지금은 창동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서울 아레나가 지어지고 있는 공간이에요. 그 당시에는 그 자리가 공터였습니다. 그래서 큰 스크린을 설치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이 함께 야외에서 응원할 수 있었죠.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열심히 응원하며 즐거웠었는데 돌아보니 그 시절이 참 그립네요. 왕희원의 얘기를 들으며 나의 어렸을 적도 떠올리게 됐다. 20년 전 도봉구는 우리에게 절친한 소꿉친구 같은 동네였던 것 같다. 왕희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운 지점도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중랑천 자전거 도로가 20년 전만 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런 휴식공간이 없던 개천에서 지금 중랑천의 모습으로까지 발전한 것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많은 변화가 느껴졌다. 왕희원은 손꼽히는 놀라운 변화로 공연장 건물인 ‘플랫폼 61’, 창업지원센터인 ‘창동 아우르네’, 영화관인 ‘메가박스’의 등장을 얘기했다. 단순히 건물이 세워진 의미가 아닌, 도봉구의 도약이라고도 얘기했다. | 현재 도봉구는 어떤 느낌인가요? 이렇게 많이 발전할 줄 몰랐어요. 도봉구에 영화관이 생길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특히 제일 많이 느껴지는 건 집값이 많이 올랐다는 거예요. 옛날에 방학동에 있는 서원 아파트가 전세로 약 3천만 원이였는데 요즘은 억 단위로 줘야 하더라고요. 여담이지만 부모님께서 그 당시 도봉구에 아파트를 안 산 걸 후회하고 계십니다. 또, 제가 3년 만에 도봉구로 찾게 됐는데 편리한 이용시설들이 생겨서 동네에서 도시적인 느낌이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낯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설들로 인해 노령화된 분위기를 좀 더 젊은 느낌으로 바꿀 수 있을 거 같아 기대되기도 합니다. 왕희원은 현재 도봉구가 마치 “오랜만에 본 절친이 취업하여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거 같다.” 라고 했다. 그만큼 예전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낯설기도 하지만 잘되는 거 같아 기대되는 모양이다. 작년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힘들었던 시기다. 취업준비생인 왕희원에게는 더더욱 힘든 시기였다. 일자리가 많이 없어져 취업이 어려웠고,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 준비로 지쳐가게 됐다. 그 시기에 왕희원은 도봉구에서 정신적으로 힐링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 작년 취업준비생 시절 도봉구에서 힐링을 받았다고요? 작년 9월 즈음에 면접 탈락도 많이 되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 자존감도 낮아져 자책을 많이 하게 됐죠. 이대로 있으면 우울증이 올 거 같아서 목적 없이 나와서 걸었어요. 그때 도봉구청 뒤쪽 중랑천 산책길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이 중랑천을 이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어요. 초안산 등산도 정말 많이 했죠. 주위에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자연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어요. 다음에는 집에서 혼자서 공부하니 외로워지는 거 같아 창동에 있는 ‘무중력지대 도봉’을 찾아 가 봤어요. 신생 공간이어서 처음엔 낯설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에 대한 의지가 다시 생겨났죠. 그렇게 열심히 스스로를 다독이고 공부하다 보니 기회가 오더라고요. 코로나로 인해 못 갔던 일본 기업의 한국 지사로의 취업 제안이 왔습니다. 현재는 재택으로 교육을 듣는 중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랜 친구 같은 도봉에서 큰 힐링을 얻었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친하고 고마운 친구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는 법이다. 20년 거주했던 도봉구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며 왕희원은 조심스레 얘기를 이어 갔다. | 도봉구에서 아쉬운 점, 바라는 점은 없는지? 젊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거 같아 아쉬워요. 관광지가 있다면 관광 후에 맛집을 가거나, 카페를 가서 얘기를 나누거나 그런 코스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아직까지 도봉구에는 관광한 후에 갈만한 곳이 없는 거 같아요. 사실 관광지도 갈만한 곳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인스타그램 감성 있는 카페나 맛집, 이쁜 술집이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살기 좋은 도봉구에서, 잘 사는 동네 도봉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왕희원님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코로나가 풀린다면 일본으로 가서 일할 예정입니다. 현재는 스마트폰 안의 칩 같은 소형 부품을 만들고 공정하는 것을 관리하는 역할의 교육을 받고 있어요. 코로나가 풀리고 교육도 끝난다면 해당 경험을 가지고 일본으로 취업해 장기적으로 머물 예정입니다. 친구 같은 도봉구, 어렸을 적 추억들이 많이 쌓여있는 곳이라 마냥 편하다고 느끼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생계를 위해 점점 도봉구를 떠나는 것이 안타깝다. 나 역시도 도봉구에 터전을 내리고 싶어도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도봉구가 넘어야 할 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쉬운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게 됐지만, 도봉구에서 유년을 보낸 청년들 마음속엔 도봉구는 언제나 따뜻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 될 듯하다. <남동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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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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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한 끼가 고민이라면 - 클릭, 도셰프의 봉스토랑
1인 가구는 밥을 먹을 때마다 다양한 어려움에 맞닥뜨린다. 식재료 양 조절 실패는 일상이다. 덕분에 매일 같은 메뉴를 해치우듯 먹는다. 주방이 작아 밥을 해먹는 일 자체가 번거로운 소동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서 요리에서 점점 멀어진다. '도셰프의 봉스토랑’은 이런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시작된 프로젝트다. 봉스토랑의 청년 셰프들을 만났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유리: 안녕하세요. 촬영과 편집을 맡고있는 율솊, 김유리입니다.연지: 안녕하세요! 카드뉴스와 sns 담당하고 있는 mbti, 신중한 tj형 엱솊, 한연지입니다.유경: 안녕하세요, 저는 굥셰프 김유경이라고 합니다. 도셰프의 봉스토랑에서 요리기획과 메인셰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은수: 도셰프의 봉스토랑을 하며 요리에 정을 붙이게 된 은셰프, 류은수라고 합니다. 회계, 기부 관련을 담당하고 있어요.민아: 안녕하세요. 베이킹을 담당하는 밈솊, 안민아입니다.소리: 안녕하세요. 도셰프의 봉스토랑 팀의 리더, 유소리입니다. ▲ 도셰프의 봉스토랑 6인 -어떻게 6명이 모이게 되었나요? 민아: 저희는 모두 덕성여대 사회학과 19학번 동기들입니다.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사업의 시작은 학교 홈페이지에서 솔이가 '도봉구 청년참여 지원 사업' 참여자 모집 공고를 보고 모두에게 알려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모두 추진력이 강하거든요, 지체 없이 바로 지원했죠. 이 사업에 지원한 사람 중 학생은 저희가 유일하다고 하더라고요. 최연소입니다. 도봉구는 올해로 5년째 「청년참여 지원사업」을 시행 중이다. 청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지원하는 이 사업은, 지역 청년들의 능동적인 사회참여를 돕고 자립기반 형성과 역량 강화에 목적을 둔다. -'도셰프의 봉스토랑'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연지: 저희 '도셰프의 봉스토랑'은 청년 1인 가구의 건강하고 든든한 한 끼 밥상을 위해서 기획된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름처럼 '도셰프의 봉스토랑'입니다. 팀원들이 건강하고 든든한 한 끼를 만드는 과정을 촬영하여 레시피와 함께 유튜브에 업로드합니다. 두 번째는 '기분이 도봉 도봉'입니다. 베이킹도 건강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비건과 통밀 베이킹을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베이킹 레시피로 만든 쿠키나 빵을 도봉구 '푸드뱅크'에 기부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봉구 미슐랭'입니다. 이 사업은 도봉구 내에 청년 사장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음식점을 유튜브와 인스타를 통해서 소개합니다. 추후에는 이렇게 소개된 음식점들을 지도로 만들어 공유할 예정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도셰프의 봉스토랑’은 식당이 아니다. 유튜브와 SNS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다. 요리 레시피, 맛집, 푸드뱅크 기부 등 청년들의 건강한 밥상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두루 다룬다. -도봉구 '푸드뱅크'에 기부하신다고 하셨는데, 자세히 설명 부탁드려요. 민아: '푸드뱅크', '푸드마켓'은 도봉구가 운영하는 사업이에요. 저소득층 주민들이 식재료를 저렴하게 구입하거나 무료로 음식을 받아갈 수 있는 식품은행 같은 곳이죠. 저희는 이 곳에 빵이나 쿠키를 기부합니다. -유튜브에 업로드 하는 레시피 영상은 어디서 촬영을 진행하시나요? 은수: 올해 덕성여대 캠퍼스타운이라는 곳에 공유주방이 생겼어요. 그 곳에서 레시피 영상을 촬영합니다. 창업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주방을 지원해요. 사무실과 촬영세트장도 있더라구요. 굉장히 깨끗하고 넓어요, 식기들도 좋고.민아: 공유주방에 오븐이 새로 들어왔는데 제가 베이킹을 담당하고 있어서 아주 기쁩니다.▲ 공유주방에서 레시피 영상을 촬영하는 모습▲ 공유주방이 있는 덕성여대 캠퍼스타운 -'자취 요리 vlog', '레시피 영상' 등 다양한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시는데,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으시나요? 은수: 레시피나 메뉴는 유튜브를 참고하고 큰 틀은 서로 간의 회의를 통해서 진행해요. 음식을 하다 실수하는 것도 편집하지 않아요. 단순한 요리 콘텐츠가 아니라, 자취생들의 일상을 함께하며 공감을 유도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레시피는 각자 가져오기도 하고, 만들기 쉬운 레시피를 생각합니다. 자취생들은 주로 화구가 하나니까 간단한 걸 포인트로 잡죠. 연지: 저는 원래 새로운 재료를 사기도 귀찮고, 요리하기도 귀찮아해요. 그런데 도셰프를 통해 레시피를 많이 알게 되어서 요리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어요.▲ 도셰프의 봉스토랑 유튜브에 업로드된 다양한 영상들▲ 도셰프의 봉스토랑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된 게시물들 -도봉구 소재의 다양한 시장소개 영상을 재밌게 봤어요. 혹시 시장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점이나 편견이 바뀐 계기가 있다면? 유경: 다양한 시장을 방문하면서 '시장은 무조건 현금결제'라는 편견이 사라졌어요. 실제로 시장을 방문하니 제로 페이와 카드 결제를 반가워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희는 또 프로젝트 지원금을 써야 하니 현금보다 지출 내역이 증빙되는 카드를 사용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걱정이 많았는데, 고민이 무색하게 당연히 카드 달라고 먼저 말씀하셨어요. 저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시장을 방문하세요!▲ 시장을 촬영하는 도셰프들 -다양한 음식점들도 소개하시면서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유경: 도봉구에는 타지역에서 찾아올 만큼 경쟁력 있는 음식점이 많아요. 인터뷰한 맛집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파는 곳들이 많더라고요. 미처 소개하지 못한 곳들은 곧 지도로 만들어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이 지도로 주민들이나 타지역분들이 도봉구의 맛집들을 방문하면 좋겠습니다. -유튜브 영상이 굉장히 퀄리티 높고 유쾌해요. 촬영을 진행하면서 중요시했던 점이 있을까요? 유리: 저희의 영상에는 격 없고 솔직한 모습이 담겨있어요. 시장에서 꽈배기를 싸게 구매해 기뻐하는 모습 등등 공감할 수 있는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마냥 노는 모습이 아니라 건강한 한 끼를 추구한다는 활동의 취지가 담긴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이런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가 공감하고 '나도 해볼까?'라는 마음이 들게 만들려고 합니다.은수: 말을 좀 더 얹자면 유리가 편집을 진짜 잘해요. 농담들도 잘 알고 인터넷 '밈'도 잘 알아요.유리: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쿠키영상도 재밌어요! ▲ 유튜브 영상 캡처, 도셰프들끼리 서로 장난을 치며 유쾌한 모습 도셰프의 봉스토랑 유튜브 영상에서는 출연진들이 실제 친구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장난을 볼 수 있다. 그 편안함이 보는 사람을 웃음 짓게 한다. -영상이 재치가 넘쳐요. 봉스토랑 말고 멤버분들이 따로 채널을 하실 생각은 없으신지 소리: 평소에 모두가 가지고 있던 유튜버 꿈을 이 사업을 통해 풀어내려고 했던 거라 '도셰프의 봉스토랑'으로 마무리 지을 것 같습니다. 다들 곧 졸업도 앞두고 있고 바빠서 할 수가 없네요. 저희 구성원 대다수가 청년 1인 가구에요. 이 사업의 진행자이자, 대상자이죠. 그래서 청년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제일 잘 알아요. 혼자 살다 보면 건강한 식사를 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또래 청년들이 든든하고 건강한 식사를 하길 바라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셰프의 봉스토랑 유튜브https://www.youtube.com/channel/UCila8OuMlX-ZwtG9rZAgmYw 도셰프의 봉스토랑 인스타그램@dochef_restaurant*거리두기 4단계로 인하여 zoom을 통해 인터뷰 진행하였습니다.<김하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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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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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미디어란 무엇인가
코로나가 민생을 어지럽히는 2021년, 지금도 방송계에 종사하여 마을 미디어에 힘쓰는 사람들이 있다. 마을 미디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영상으로 남겨 전하고자 하는가? 마을이 남기는 발자취, 우리가 쫓는 마을 미디어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러한 이유로 도봉구의 마을 미디어를 맡고 계시는 인원식 감독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Q 도봉구의 업무를 맡으신 후 달라진 점이 있으신가요? A 예전에는 방송이란 일을 일로써만 접했습니다. 항상 업무로서의 중압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도봉구에서의 방송이란 친밀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마을 미디어라는 측면에서도 큰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구민 한명, 한명에게 친근감있게 다가갈 수 있는 미디어. 이것이 도봉구의 최대장점이라 생각합니다. Q 미디어와 관련된 도봉구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A 또 다른 장점이라면 구 속에 있는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도봉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은 여러 촬영지로도 쓰이는 만큼 그 잠재력이 대단합니다. 평범한 도시에서는 만들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어 다양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근린공원 또한 큰 도움이 됩니다. 구민들에게는 여가시간이 되어주며 저와 같은 방송인들에게는 새로운 장소가 되고 또한 행사지로도 사용 가능합니다. 이렇게 도봉의 아름다운 자연은 미디어에서 특히 강점을 보입니다. Q 미디어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A 미디어는 삶의 수단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모든 영역에서 미디어로부터 정보를 얻고 생활전반에서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육, 의료, 보건, 행정, 사법 그 어느 곳에서도 미디어 없이는 자립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행정기관 교육 영상물을 담당한 적도 있었던 만큼 앞으로는 더더욱 우리 삶 속에 미디어가 차지하는 부분이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Q 코로나와 접하게 된 후 방송계에서의 큰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A 앞서 말씀했듯이 방송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는 방송을 더욱 일상으로 다가오게 했습니다. 비대면 수업, 실시간, 화상 방송, 스트리밍 이 모든 것들은 코로나로 인해 더더욱 그 수요가 증가했습니다. 코로나는 분명 괴로운 일이지만 지금처럼 이에 좌절하지 않고 더더욱 노력한다면 더 많은 컨텐츠가 생성되어 나아가 방송계의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앞으로는 이러한 실시간 VR, AR 시장이 더더욱 활발해지고 있으니 구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Q 방송을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A 방송을 일로 생각하면 계속 방송에 남아있기 힘듭니다. 저 또한 그랬지만 결국 방송은 놀이입니다. 이제는 모든 영역에서 방송이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 영역에서 자신은 누구인가? 어떤 방송인이 될 것인가? 어떤 눈으로 미디어를 바라볼 것인가를 명확히 한다면 세계적이고 올바른 방송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원식 감독님은 도봉구의 마을 스튜디오 TO GO IT GO에 계셨다. 최근 마을일 그리고 여러 기관들의 업무를 맡으셨다는 감독님은 스튜디오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현장을 알려주셨다. 현재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휴먼 뉴딜, 그 정책을 누구보다 먼저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도봉구에서의 방송인, 그리고 도봉구만의 마을 미디어를 느낄 수 있었다. 도봉구만이 가진 특성, 구와 구민간의 친근함, 자연경관 그리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미디어. 이러한 특성이 도봉구의 마을 미디어를 만들어냈다. 마을 미디어란 아카이브와도 큰 연관이 있다. 마을에서 느끼고 접할 수 있는 것을 영상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마을 미디어.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기록하는 아카이브. 아키비스트로써 이러한 연결점은 마을 미디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더욱 마을 미디어와 아카이브에 힘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정세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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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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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주민의 삶을 돌아보다 (4) - '국수와 함께 한 세월' (나염분님, 김용문님의 삶)
방학동 성당 앞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끼니를 채우려 주변 길가로 나왔다. 함께 운동 한 지인이 간단한 요기를 채우기엔 국수가 좋다며 내 옷자락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방학동에는 국수 체인점이 들어서기 전부터 토박이 국숫집이 많았던 것 같다. 제분소가 특화된 지역도 아닌데, 언제 이렇게 국숫집들이 들어서게 된 걸까. 서민의 허한 속을 뜨끈하게 달래주는 음식이어서, 그랬던 걸까. 방학동의 국수 역사가 궁금해졌다.▲ '자매호프 국숫집' 앞 지인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첫 국숫집은 ‘자매 장터국수’(지금은 자매호프집)다.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작은 공간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눈매가 예사롭지 않은 주인아주머니(74세, 나염분)가 우리를 맞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니 삶은 계란 두 알이 눈에 들어온다. 계란을 까먹는 사이 아주머니는 뜨거운 물에 국수를 안치고는 대뜸 우리들 앞자리에 앉았다. 아주머니는 무릎 수술 때문에 장사를 잠시 쉬어야 했다고 한다. ‘한참을 고생하고 나왔더니 일하기가 너무 힘드네. 요 손녀딸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라’하며 넋두리를 했다. 단골인 나의 지인과는 알고 지낸 지가 꽤 된 것 같았다. 연신 주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도 이야기 끈은 계속 놓지 않았다.▲ 국숫집 주인 나염분 씨 염분씨가 이곳 방학동에 온 지는 40년이 됐다. 화곡동 아파트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이곳까지 오게 됐다. 염분씨 가족의 보금자리는 방학동 성당 뒤편에 있는 하꼬방 월세 집이었다. 당시만 해도 변두리였던 방학동에서 살기는 쉽지 않았다. ▲ 자료 : 80년대 포장마차, 출처 : 네이버 염분씨는 30년 전 학마을 도서관 자리에 포장마차를 시작하게 됐다. 이곳에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근처에 세차장이 있어 쉽게 물을 끌어다가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쌍문1동 극동아파트가 세워질 무렵, 주인집 아주머니 소개로 공사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차려주는 함바일을 했다. 친정 엄마에게 물려받은 음식 솜씨도 좋았지만, 남편이 안겨준 빚더미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설 시기라 ‘함바’ 수요가 많았다. 아파트가 세워질 때마다 규모가 큰 함바집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아주머니 음식을 먹으러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단골들이 많아지자 음식 솜씨가 아깝다며 국숫집 하나 차리라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됐다. 결국에는 언니와 함께 포장마차를 하나 차렸다. 포장마차가 잘되는 날은 150인분이 팔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도봉구에서는 최초로 청양고추를 장터국수에 넣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어느덧 이 포장마차의 시그니처가 됐다. 명성에도 불구하고 구청에서는 잊을만하면 서울시장이 나온다고 때마다 단속을 나왔다. 하마터면 일수 백만 원에 간신히 얻은 바퀴 달린 리어카도 빼앗길 뻔 했다. 얼마나 속을 졸였는지 당시 단속계장이 아직도 염분씨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방학동 장사는 그녀에게 하나의 자존심이었다. 창동역, 목이 좋은 자리로 옮겨 단골손님들을 포기하기보다 좀 손해를 보더라고 시작한 곳에서 끝까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다. 손님 중에는 꼭 진상인 사람들이 있었다. 처녀시절 YMCA에서 갈고 닦은 유도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만드는 손님이었다. 실랑이 끝에 아이를 업고 경찰서에도 처음 불려가 봤다. 얼마 안 돼서 언니도 김포로 이사를 갔다. 여자 혼자로는 갈수록 힘에 부치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결국 방학동 성당 옆에 있는 현재의 음식점 자리로 옮기게 됐다. 간판이름은 언니와 늘 함께해서 자매 국숫집이라고 지었다. 차츰 단골도 늘고 멀리서도 찾아와주는 손님이 많아지면서 어느 정도 빚도 갚을 수 있었다.▲ 장터국수 한그릇과 주방내부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단골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손님들은 입을 모아 가게 집 주인의 후덕함과 넘치는 인정, 그리고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국물 맛을 최고로 쳤다. 국수는 대구에 있는 막국수 집에서 특별히 공수한 것만을 고집했다. 한번은 국수골목으로 유명한 태릉 국수거리 원조집 주인이 몰래 이 집을 찾아왔다. 원조집 주인은 염분씨의 장터국수가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다고 그 후로도 계속 단골이 됐다고 한다. 도봉구 국숫집을 향한 나의 호기심을 채워준 두 번째 가게는 방학동에서 24시간 운영하는 ‘시대 우동’집이다. 오후 3시쯤 가게를 찾아가 봤다. 점심시간이 거의 지난 시간이라 손님이 적을 시간대라 이야기 나누기가 좋은 시간일 것 같았다. 안쪽 주방에서는 아드님처럼 보이는 젊은 분이 국물을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늙수그레한 아저씨 한 분은 출입구를 서성이며 일을 하고 계셨다. 시대우동 주인아저씨(81세, 김용문)였다.▲ '시대우동' 주인 김용문 씨 용문씨의 고향은 경북 풍기다. 16세쯤 태백으로 올라와 가게 일을 배웠다. 성인이 돼선 돈을 모아 잡화점을 하나 마련했다. 꽤 장사가 잘됐다. 결혼 후엔 아이들 교육이 걱정돼 서울 마포로 이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님이 있는 부천으로 이사했다. 젊었을 적 배운 장사 솜씨로 용문씨는 신발, 가방을 팔며 살아갔다. 신발 떼 오는 일이 힘들고, 가방 유행도 시들해질 때쯤 용문씨는 방학동에 오게 됐다. 방학동 도깨비 시장에서는 문구점을 했다. 일이 한가할 때면 당시 판자촌(지금의 발바닥 공원)이던 주변 길을 산책하곤 했다. 어느 날 그 앞쪽 대로변에 상가 분양 소식이 들렸다. 순간 귀가 쫑긋해졌다. 신동아 아파트가 들어서는 이곳에 슈퍼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87년도에 지금 가게 자리로 입성하게 됐다. 슈퍼 맞은편 유아원 앞쪽에는 우동을 파는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분양받은 건물에서 슈퍼를 운영하던 용문씨는 그 포장마차를 가끔씩 이용했다. 포장마차 주인도 용문씨의 슈퍼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사가곤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포장마차 아저씨가 노름에 빠져 장사를 돌보지 않고 장사를 접게 됐다. 홀연 우동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적으로 슈퍼 안쪽에 간이 식탁과 의자를 세 개 두어 우동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는 음식점도 별로 없었고 택시 운전사들이 많이 찾던 곳이라 슈퍼보다 우동장사가 더 잘됐다. 그래서 점차 규모를 늘려 아예 우동식당을 차리기로 했다. 이때부터 ‘시대우동’집이 시작됐다. 가게 이름의 ‘시대’는 길음 시장에서 물건을 떼러 갔을 때 호황을 누리던 문구점 이름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그런지 우동집은 먹고 살 만큼은 장사가 잘 됐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국물에 정성을 기울이니 점점 손님 늘어갔다.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자 국수도 손으로 직접 뽑아서 만들었다. 단골손님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시대우동'집 문 앞과 주방 내부 식당 옆에는 담배장사도 겸하고 있었다. 하루는 도둑들이 가게 문 자물쇠를 절단하고 식당에 있던 담배들을 몽땅 훔쳐갔다. 80년대 한 갑에 천 원을 하던 담배의 손해는 현시세로 사천만 원이 넘을 정도였다. CCTV도 없던 시절, 네 차례나 도둑을 맞고 나니 범인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대신 가족들이 새벽까지 잠을 설쳐가며 보초를 서게 됐다. 그 이후로는 24시간 장사를 하는 집으로 입소문을 타게 됐다. 덕분에 장사는 점점 더 속도를 내게 됐다. 김밥과 오뎅 우동으로 메뉴도 점차 늘었다. 매상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조미료 하나 없는 순수한 재료로 시대 우동만의 맛을 지키려고 평생 애를 썼다. 지금은 아들에게 가게 일을 일부 맡기고 여유도 얻게 됐다. 동네친구들이 놀러와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괜찮고 텔레비전 유행가에 혼이 빠져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담배 장을 지키느라 24시간을 지새우고, 국물 맛을 내려 고군분투하던 시절을 지나 가게와 국수를 모두 용문씨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진짜 주인이 된 것이다.▲ 우동 한 그릇 두 분이 맛보라고 내주셨던 국수 한 그릇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소박하다 못해 허전할 정도로 단순했다. 혀로 느껴지는 조미료의 기교나 메뉴의 다채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오랜 세월 애써 지켜온 은근한 맛과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줬던 그 성실함만이 올곧이 남아 있었다. 자영업자로서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인생의 고단함이 한올 한올 따라 올라왔고, 팍팍한 인생사를 헤치고 간 역경의 시간들이 국물 맛에 진하게 배어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그분들의 노력이야말로 방학동 국숫집의 계보를 잇는 소중한 주추가 되어주고 있었다. <정지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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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실